[Issue IN] 경주 지진, 그날 월성원전에 무슨 일이…
대단지 불시정지 시 주파수 급락 광역정전 불가피
발전설비 집중화 막지 않으면 불시정전 위기 상존

▲ 동해 남부권 발전설비 위치 및 설비용량 현황

[이투뉴스] 관측 이래 최대 규모(5.8)의 경주 지진이 발생한 시각은 지난 12일 오후 8시 32분. 48분전(오후 7시 44분) 5.1 규모의 전진(前震)이 한차례 한반도 전역을 흔든 뒤다. 시선은 진앙지 인근에서 가동되던 원전으로 쏠렸다. 당시 월성원전 지진계가 계측한 충격은 지진가속도값 기준 0.0981g. 관련 매뉴얼에 규정된 수동정지 값(0.1g)에 근접한 수치다.

한국수력원자력에 초비상이 걸렸다. 지진 충격에 원전 주요시설이 멀쩡한 지를 우선 확인해야 했고, 실제 노출된 충격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기 위해 사내 전문가를 동원한 응답스펙트럼값(원전 구조물이 지진동에 대해 반응한 최대값) 다중분석이 시작됐다. 결과는 수동정지 기준인 0.1g 초과. 규정에 따라 월성 1~4호기를 세워야 한다.

하지만 원전정지는 자동차 시동을 끄듯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닌데다 위험도 뒤따른다. 항상 100% 출력으로 운전하는 원전은 최고조로 달아오른 용광로로 비유할 수 있다. 핵분열 과정에 엄청난 열이 발생하고, 이 열에 원전 주요계통도 뜨겁게 달궈진다. 일단 국내 유일 중수로형(캔두형) 월성원전 정지 과정은 이렇다.

우선 정지봉을 노심에 삽입하거나 특수용액을 주입해 핵반응부터 멈춰야 한다. 이렇게 해도 노심과 증기발생기 등 원자로내 주요계통에는 여전히 뜨거운 잔열이 남는다. 전력을 지속 공급해 펌프를 돌리면서 계속 바닷물을 끌어대야 한다. 통상 안전한 수준까지 온도를 낮추려면 사흘 가량이 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약 이 후속공정에 차질이 생기면 원전은 더 이상 발전소가 아니다. 원자로 내부가 고온·고압의 상태가 되고, 최악의 경우 노심융용과 그로 인한 수소가스 발생으로 원자로가 폭발할 수도 있다. 모든 원전이 소외전원이나 디젤발전기 등 2~3중 비상전원을 상시 유지하는 이유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지진이 아니라 해일에 잠긴 비상발전기가 무용지물이 되면서 정지원전 냉각실패로 발생했다.

이날 지진파가 정지 기준을 넘어선 것으로 판단한 한수원은 규정에 따라 원전을 세우기로 방침을 정한다. 그런데 긴박한 그 순간에도 고려해야 할 사안은 적지 않다. 즉각 원전을 정지할 경우 안전에 문제가 없는지를 우선 따져봐야 하고, 어떤 원전부터 세울 지 또는 4기를 모두 정지할 경우 전력수급에는 영향이 없는 지 등을 전력거래소 등 당국과 협의해야 한다. 매뉴얼이 그렇다.

이런 절차를 밟아 최종 원전정지에 착수하기까지 소요된 시간은 3시간 24분. 비상 매뉴얼에 적시된 ‘4시간 이내 정지여부 결정 및 실시’ 규정 이행 제한시간을 36분 남긴 때다. 결국 월성 1~4호기는 12일 오후 11시 56분부터 13일 오전 12시 20분 사이 국내 원전 역사상 최초로 지진에 의한 수동정지를 감행하게 된다.

지난 22일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의 긴급 현안질의에서 ‘지진값이 정지 기준을 초과했는데 왜 즉시 원전을 세우지 않았느냐’는 의원들의 추궁에 대해 조석 한수원 사장이 “안전정지를 위해 계통이 정상적인지, 원전을 세우면 전체 전력수급에 문제가 없는지 등을 판단하는데 4시간 정도가 걸린다”며 규정 불이행 여부를 부인한 배경이다.

불행중 다행으로 경주 지진으로 인한 원전설비 피해나 중대 사고는 아직 보고되지 않고 있다. (원자로 건물공조기를 대신하는 보조증기계통이 밸브 고장으로 3일간 지연 가동된 사고 제외) 가슴을 쓸어내린 원전 당국은 원자력안전위원회 등 규제기관과 협의해 조만간 정지원전을 재가동 할 것으로 보인다.

앞서 정부는 기존 원전 내진성능을 시급히 보강하겠다고 공언했고, 원전 심장부인 월성 1호기 주제어실까지 직접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은 "원전은 국민 생명하고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한 치의 실수도 있을 수 없는 시설"이라며 철저한 방재대책을 주문하기도 했다. 9.12 지진과 그로 인한 초유의 원전 정지사태는 그렇게 국민 관심사에서 점차 잊혀질 공산이 크다.

그런데 이제부터 살펴볼 문제는 대통령이 ‘초를 다투는 국가적 과제’로 지목한 “더 큰 지진이 났을 때 우리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와 미지의 영역에 가려진 대형 원전 집중화의 잠재된 위험에 대한 이야기다.

우선 시간을 지진 발생시점으로 되돌려 보면, 12일 오후 8시 30분 기준 전국에서 소비되던 전력은 6544만kW. 여기에 전력생산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가동가능 상태를 유지하며 대기중인 예비력도 1740만kW에 달했다. 발전기 불시 정지에 대비해 운전중인 발전기로부터 확보하는 예비력은 150만kw 이상으로 규정되어 있다.

다행히 이번 월성원전은 수동 정지하는 상황이라 대기중인 발전기를 가동해 정지 설비용량만큼(277만kW)을 즉각 대체가 가능했다. 불시 정지가 아닌 자동정지가, 그것도 수급이 빠듯한 전력피크 때 더 많은 원전을 대상으로 이뤄졌다면 전력수급 자체에 중대한 차질이 발생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 맥락에서 9.12 지진은 적어도 수급 관점에서 볼 때 이상적 여건 아래 발생한 재난이다.

반면 전력계통 전문가들이 상정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따로 있다. 이번 지진처럼 일정 규모 이상의 발전력이 불시 탈락(정지)하면 단일망으로 엮인 한반도 전역의 계통주파수(60Hz)는 일시적으로 하락한다. 실제 2010년 9월 태풍 곤파스로 태안화력 1~4호기 인출 송전선로가 트립(TRIP·고장)되자 1672MW규모의 발전력이 탈락(송전중단), 주파수가 59.68Hz까지 곤두박칠쳤다.

현재 동해 남부권에 포진해 있는 원전은 월성 1~4호기를 비롯해 모두 12기(고리 1~4호기·신고리 1,2호기·신월성 1,2호기 등)로 설비용량만 991만kW에 달한다. 지진 영향 범위에 따라 언제든 더 많은 원전이 정지 대상에 포함될 수 있다. 특히 지진 강도가 좀 더 세 당국이 이것저것 따져볼 틈도 없이 다수호기가 일시에 자동정지 했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다.

만약 월성이 아닌 고리 발전단지에서 진도 6.5 이상의 대형 지진이 발생한다면 자동정지 장치에 의해 단지내 모든 발전기가 일시에 멈춰서고, 이 충격을 한반도 계통이 안정적으로 견딜 수 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가장 낙관적인 경우에도 저주파수계전지(UFR)에 의한 1단계 부하차단량(전력공급량의 6%)만큼 정전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변전소내에 설치되는 UFR은 일정수준 이상 주파수가 비정상적으로 떨어질 때 순간적으로 부하를 자동 차단해 전 계통으로의 파급을 막아주는 장치다. 다시 말해 12일 지진 발생 당시 고리 인근에서 강진이 발생했다면 최소 2011년 9.15 순환정전 당시 부하차단량과 비슷한 392만kW(6544만kW의 6%) 규모의 정전이 불가피했다는 얘기다.

전력당국 한 관계자는 “계통운영은 항상 비상 상황에 대응해 단계별 대응책이 마련돼 있다”면서 “하지만 지진에 의한 발전단지 동시 정지는 단지 규모가 크기 때문에 대규모 정전을 피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전영환 홍익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는 “발전단지가 커질수록 잠재 정전위험도 비례해 상승한다. 대형발전단지의 발전정지에도 대규모의 정전을 피하기 위해서는 단지내 설비용량을 일정 수준으로 제한하거나 줄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영탁 한밭대 경제학과 교수는 “분산전원 확대, 원전 점진감축 등을 통해 장기적으로 기존 발전소 밀집도를 낮추는 방안을 시급히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복 기자 lsb@e2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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