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압록강 철교 완공, 1959년엔 사라호태풍 피해, 1983년 아웅산사건, 1995년엔 전두환.노태우 씨 구속

돼지띠 새해가 밝아온다. 돼지는 상서로움과 탐욕스러움을 동시에 상징한다. 이 같은 모순은 삶의 모습 그 자체이기도 하다.

 

2007년 정해년(丁亥年)은 어떤 역사를 준비해놓고 있을까. 그에 앞서 돼지띠 해는 과거에 어떤 발자취를 남겼을까. 지난 100년 동안 돼지띠의 해가 남긴 기록을 살짝 들여다본다.

 

▲1911년 = 20세기 첫 돼지띠 해이자 한일합방 이듬해로 일제 총독부가 식민화작업을 본격화하던 시기다. 토지조사사업 과정에서 '삼림령'을 발표해 국유림과 사유림을 구분했고, 신고하지 않은 산림은 국유림으로 편입해버렸다. 그 결과 국유림이 8천303정보로 사유림 7천546정보보다 많았다.

더불어 '어업령' 공포로 일체의 어업행위가 허가를 받아야 가능했다. 반면 일본어민은 조선에서 자유롭게 고기잡이를 할 수 있는 길이 트였다. 총독부가 '조선은행법'을 공고한 뒤 한국은행을 인수해 조선은행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했는데, 중역만은 일본 대장성이 직접 임명해 돈줄을 통제했다.

압록강에 철교와 인도교가 놓인 것도 1911년의 일이다. 의주 아래 쪽과 중국 안동을 연결하는 길이 944미터의 압록강 철교는 51만 명이 동원돼 2년 만에 완공됐다. 이로써 다리 남쪽에 생긴 신의주가 행정과 경제 중심지로 번창했고, 일제는 중국 침탈의 가교를 마련했다.

일본경찰이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600여 명을 체포한 신민회사건이 일어난 것도 이해였다. 검거자 중 105명이 기소됐다고 해 105인사건이라고도 하는데, 이를 계기로 신민회가 해체되며 국내의 민족운동이 큰 타격을 받았다.

 

▲1923년 = 망국의 역사 속에 무력으로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움직임이 활발했다. 대표적인 단체가 의열단. 총독과 고관, 군부수뇌, 매국노, 친일파 거두, 밀정과 반민족적 토호 등을 암살하고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경찰서 등 주요기관을 파괴하자는 것이었다.

의열단은 1923년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하고 자치권과 참정권을 주장하며 일본과 타협하려는 자들을 '우리의 적'으로 규정한 가운데 외교론과 준비론을 비판했다. 신채호가 쓴 이 선언문은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무기다"며 강경투쟁에 나섰다.

이런 와중에 일본에서는 관동대지진이 발생해 6천661명의 조선인이 참살되는 비극을 겪었다. 일본 국수주의 세력은 '조선놈들이 우물에 독약을 뿌린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조선놈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자'고 선동했다.

전라도 암태도에서 소작쟁의가 벌어져 1년 동안 계속되고, 경상도 진주에서 백정들의 단체인 형평사가 발족돼 평등운동에 나선 것도 이해의 일이다. 이런 가운데 방정환 등은 '어린이' 잡지를 창간하고 색동회를 조직했으며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지정하기도 했다.

 

▲1935년 = 중국땅에서 독립운동 하던 세력들이 일제의 만주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통일전선을 형성했고, 그 결실로 1935년 7월에 조선민족혁명당을 발족했다. 이 단체는 대일전선을 통일하고 강화하기 위해 기존의 각 정당이 자진 해체하고 생긴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놓고 갈등과 대립도 끊이지 않았다. 지방자치제, 남녀평등, 토지 국유화 등을 내걸어 사회민주주의 색채를 띤 이 단체에 대해 조소앙의 한국 독립당계와 이청천의 조선 혁명당계가 중도 이탈했다. 애초부터 참여를 거부했던 김구 등 임정 고수파는 이해 11월 한국국민당을 결성했다.

총독부가 9월 각급 학교에 신사 참배를 강요하자 개신교계 중심으로 극렬히 반발했다. 개신교계의 명분은 신사 참배가 우상숭배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장로교, 감리교 등이 차례로 참배로 돌아섰고, 불교와 천도교도 그대로 따르는 분위기였다.

단성사에서는 최초의 발성영화인 '춘향전'이 개봉됐고,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인 최용신과 독립운동가 이동휘, 종두법 보급자 지석영이 타계한 것도 1935년의 일이었다.

 

▲1947년 = 해방을 맞았으나 한반도는 그 후유증과 새 질서 모색으로 혼란스러웠다. 미군정청은 민정이양을 위한 한국의 과도정부를 2월에 수립하게 해 안재홍이 행정부 최고책임자인 민정장관에 취임했다. 그러나 실권은 여전히 미국이 쥐고 있었고, 이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이듬해에야 이양됐다.

광복 직후인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삼상회의 합의에 따라 설치된 미소공동위원회는 1946년 제1차 회의에 이어 1년 만인 이해 5월 제2차 회의를 열었으나 신탁통치 반대투쟁 단체를 둘러싼 논란과 미국측의 소극적 태도로 결렬되고 말았다.

정계는 격동의 한 해를 보내야 했다. 여운형은 극좌와 극우에게서 소외된 가운데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으나 7월에 극우파에 의해 암살됐고, 송진우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을 창당했던 장덕수도 경찰에게 12월 초 피살됐다. 이런 가운데 김구는 12월 22일 남한 단정수립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체육계에서는 세계제패의 낭보를 전해왔다. 서윤복 선수는 4월 19일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2시간 25분 39초로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해 손기정 선수가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우승한 이후 11년 만에 세계 정상에 서는 쾌거를 이뤘다.

 

▲1959년 = 이승만 대통령은 관변단체를 속속 창립하며 장기집권의 기반을 닦았다. 이승만을 총재로, 이기붕을 부총재로 한 대한반공청년단이 1월 발족했고, 3월에는 어용 문화단체인 반공예술인단이 만들어졌다. 대한노총도 노동단체라기보다 반공단체이자 이승만의 친위부대 성격을 띠었다. 연초부터 연말까지 계속된 재일교포 북송반대 집회는 반공과 반일이 결합된 시위였다. 이 와중에 자유당 정권의 정적인 장면을 지지하던 경향신문이 폐간의 운명을 겪었다.

3년 전에 실시된 5.15선거에서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23.8%의 득표율을 보였던 조봉암은 이른바 진보당사건으로 이해 2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여기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조병옥이 10월에 후보사퇴를 선언한 뒤 이듬해 숨져 이승만의 장기집권은 한동안 순항하는 듯했다.

이 해에 몰아닥친 가장 큰 자연재해는 사라호 태풍이었다. 9월 17일에 한반도를 강타한 이 태풍은 사망과 실종 849명, 이재민 37만3천459명, 선박 파손 1만1천704척 등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를 냈다. 이 태풍은 1904년 기상관측 이래 최대 규모였다.

 

▲1971년 = 박정희 대통령은 4월 실시된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승리하며 장기집권의 토대를 닦았다. 그러나 그의 장기집권체제는 야당과 시민은 물론 공화당 내부에서마저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공화당 비주류가 이해 10월 초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건의안을 야당과 함께 통과시켜 이른바 공화당 항명파동을 불러왔다. 여름인 8월 말에는 서울대 교수 600여 명이 학원자치를 요구하며 대학자주화운동을 펴기 시작했다. 10월 중순에는 수경사 장병들이 고려대에 난입한 것을 계기로 항의집회가 잇따랐고, 15일에는 급기야 위수령이 서울에 발동되면서 각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또 12월 27일에는 야당의 반대 속에 국가보위법이 변칙 통과됐다.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하고 근로자의 단체교섭권 등을 규제한 이 법이 제정됨에 따라 대통령의 권한은 전에 없이 커졌으며 사회적 반발 움직임도 그에 비례해 거세갔다.

8월 10일에는 지금의 성남에 강제이주된 철거민 등 도시빈민 3만여 명이 폭동을 일으킨 경기도 광주대단지사건이 발생했고, 12월 25일에는 서울 대연각 호텔 화제가 발생해 165명이 사망했다. 충남 공주에서 무녕왕릉이 발견돼 백제사 연구에 한 획을 그은 것은 7월 초였다.

 

▲1983년 = 비극적 사건이 가을 들어 잇따라 발생해 충격을 주었다. 9월 1일에는 사할린 부근에서 항로를 이탈한 대한항공기가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돼 탑승자 269명 전원이 사망했다. 10월 9일에는 전두환 대통령 등이 순방 중이던 미얀마의 아웅산 묘소에서 북한 특공대의 폭탄 테러를 당해 이석준 부총리 등 17명이 목숨을 잃었다.

8월 말에는 명성그룹 김철호 회장 등이 명성그룹사건으로 구속돼 파장을 일으켰다. 고위관리와 결탁해 세금포탈과 금융부정을 저지른 이 사건으로 윤자중 전 교통부장관 등이 뇌물수수 업무상횡령방조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이 사건은 한 해 전의 장영자사건과 함께 1980년대를 대표하는 추문으로 기록됐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일본 총리로는 최초로 1월 11일 서울을 찾아 한일 첫 공식정상회담을 가졌다. 북한군 조종사 이웅평 대위가 미그 19기를 몰고 휴전선 넘어 귀순한 게 2월이었고, 대도(大盜) 조세형이 구치감에서 탈주한 것은 4월이었다. 또 12월에는 문교부가 학원 자율화조치를 발표해 대학에 상주하던 경찰병력을 철수시켰다.

 

▲1995년 = 5.18 광주학살 원흉으로 비난받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12월 3일 구속 수감됐다. 이에 앞서 11월 16일에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기업체들에게 각종 특혜를 제공하고 수천억원을 챙긴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서울 강남의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사고는 502명의 목숨을 앗아가며 배금주의와 인명경시 풍조에 대해 준엄하게 경고했다.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기초의원을 뽑는 4대 지방선거가 6월 27일 실시돼 지방자치시대가 30여년 만에 다시 열렸다.

김대중 아태재단이사장이 7월 18일 정계복귀 의사를 밝힌 뒤 9월 5일 새정치국민회의 창당대회에서 총재로 취임함으로써 14대 대선 패배 후 2년 8개월여 만에 정치일선에 공식 복귀했다.

부동산을 실소유자 이름으로만 등기하는 '부동산실명제'가 7월 1일 시행됐고, 4월 28일 대구지하철에서 도시가스가 폭발해 시민 101명이 숨지고 202명이 중경상을 입는 참사가 발생했다. 3월 1일에는 보도, 교양 등 각 분야의 21개 전문채널이 전국 50개 종합유선방송국에서 방영돼 케이블TV시대의 막이 올랐다.

 

▲2007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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