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위원회)가 6일 일제강점초기인 1904년 러일전쟁 개전부터 3ㆍ1운동 때까지를 대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 106인을 골라 명단을 공표한 것은 한국 근ㆍ현대사의 판도라 상자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과거사 청산 차원에서 진행된 친일행위자 명단 발표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민족문제연구소를 중심으로 민간 차원에서는 꾸준한 친일행위 발굴과 명단 발표가 있었으며 그 때마다 거센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명단 발표는 그 주체가 대통령 직속 기구라는 점에서 종래와는 확연히 다른 위상을 지닌다. 국가가 '공인'한 반민족행위자로 낙인 찍히기 때문이다.

물론 위원회는 이런 명단 발표가 "개인을 법적으로 처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과거 잘못된 역사에 대한 성찰과 정의로운 사회 실현을 위한 공동체의 윤리를 정립하는 데 있다"는 말로 "역사적 의미를 강조" 한다. 부관참시(剖棺斬屍)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친일행위자로 지목된 인물의 후손 대부분은 이번 발표를 '조상에 대한 부당한 부관참시'로 받아들인다. 그들의 후손이나 유족과 같은 '직접 당사자' 뿐만 아니라, 친일행위 구명으로 대표되는 과거사 청산운동을 둘러싸고 그간 한국사회 내부에서는 첨예한 찬반 논란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 문제의 여진이 결코 간단치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어쩌면 이번 친일파 명단 발표는 두고두고 역사의 단골 주제로 등장할 지도 모른다. 과거사 청산이라는 당위성이 일단은 사회적 우세를 점한 지금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하 특별법)을 제정하고 이를 기반으로 그 '구체적 성과'를 내놓게 됐지만, 이와 같은 '지금의 역사적 평가'는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

친일파 청산을 찬성하는 쪽에서는 '민족정기' 회복을 위해서는 반드시 그 민족정기를 해친 행위와 행위자들에 대한 역사의 심판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을사오적나 일진회 관련자 등은 '민족의 수치'인만큼 비록 늦기는 했지만, 역사의 심판을 통해 민족정신이 살아있음을 후세에 남겨야 한다고 역설해왔다.

나아가 이들은 과거사 정리나 청산이 역사적 정당성이 있음을 홍보하기 위해 독일과 프랑스의 사례를 준용하곤 했다. 프랑스도, 독일도 전후 나치정권 협력자를 처벌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런 흐름은 민주화 운동기인 70-80년대에는 이른바 진보좌파를 표방한 일군의 지식인들을 사로잡았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를 '역사의 치욕'으로 간주한 이들은 남북분단의 가장 중대한 원인으로 친일파들을 거론했다. 즉, 이승만이 친일파를 청산하기는커녕 그들을 중용해 역사청산은 호기를 놓쳤으며, 그것이 결국 남북분단으로 간 한 원인이었고 나아가 남북분단을 고착화한 원인이 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 나아가 반군사독재 운동을 증명하는 한 징표이기도 했던 친일파 청산운동은 90년대 이후, 특히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거센 '탈민족주의 운동'이라는 '저항'에 직면했다.

물론 과거사 청산파들에게 이런 저항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종래의 저항이 이른바 '기득권 수호' 차원에서 전개된 것이라면 2000년대 이후에 전개된 반대 움직임은 청산의 당위성을 뒷받침하는 가장 큰 줄기라고 할 수 있는 '민족'의 정의조차 흔들었다.

이들은 '민족'이라는 개념이 빨라야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그것이 확고하게 자리내리기 시작한 것도 1919년 3.1운동 이후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이들 반대파는 '민족'이라는 개념을 가치중립으로 치환한다. 즉, 민족은 그 자체가 선과 악을 판별할 수 있는 도덕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민족이 가치중립적인 개념이라면 그것을 절대적 도덕 잣대로 삼아 그에 반하는 행동을 '범죄'로 판별할 수는 없게 된다.

이들이 보기에 이번 명단 발표를 가능케 한 특별법만 해도 곳곳에 독소조항을 담고 있다. 예컨대 친일행위자 범주로 '국권'을 해친 행위 등을 열거하고 있으나, 이 때의 국권이 국가의 권리인지 국민의 권리인지도 분명치 않다고 말한다.

멸망 당시 조선왕조(대한제국)는 국가의 주인이 '국민'임을 표방한 국민국가(nation-state)가 아니라, 국왕이 곧 국가인 절대왕정 국가였다. 따라서 국권의 상실은 엄밀히는 국왕의 권리(권능) 상실이지, 국민의 권리가 박탈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고 과거사 청산 반대론자들은 주장한다.

이번에 국가가 공인한 친일파 명단이 공포되었다고 해서, 그 찬반을 둘러싼 논란이 수그러들지는 않을 듯하다. 그런 점에서 명단 발표는 판도라의 상자를 닫은 것이 아니라 열었다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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