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겨울이면 뉴욕에서의 아련한 기억이 떠오른다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가진 못하지만 나는 늘 여행을 꿈꾸며 산다. 새롭고 낯선 곳을 동경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변화를 즐기며 살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나의 많지 않은 해외여행 경험 중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여정이 있다면 지난 2000년 12월 업무 차 다녀온 뉴욕에서의 며칠일 것이다. 마침 그 해 리처드 기어와 위노나 라이더가 주연한 ‘뉴욕의 가을’이라는 영화가 개봉됐는데 두 주인공이 늦가을 센트럴 파크에서 손을 잡고 낙엽을 밟으며 걷는 장면이 아주 인상 깊었다.

그런 멋진 장면들을 생각하며 도착한 뉴욕. 맨해튼 상공에서 기창 밖으로 가장 먼저 내 눈에 든 것은 안개 속에 빽빽이 들어선 빌딩군. 그 중에서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지금은 사라진 세계 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었다.

며칠 간의 출장 일정을 마치자 나에겐 이틀 정도의 자유시간이 할애됐다. 도착할 때 본 두 마천루와 UN본부, 월 스트리트, 뉴욕 미술관 등 영화 속에서만 보아 왔던 곳을 두루 다녔다.

일정의 백미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두 편이나 감상한 것이었다. 첫 편은 ‘미스 사이공’이었다. 극 중반쯤 웅장한 소리와 함께 무대로 헬기가 하강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이 뮤지컬에 나오는 ‘I still believe’나 ‘Why God why’등은 지금도 즐겨 듣곤 한다. 다만 이 작품이 수입 되지 않아 국내에서는 다시 무대를 볼 기회가 아직 없었다는 점은 아쉽게 느껴진다.

다음은 사라 브라이트만을 글로벌 스타로 만든 ‘오페라의 유령’이었다. 그 이전에도 사라 브라이트만이 부른 ‘Think of me’, ‘All I ask of you’, ‘The phantom of the opera’ 등을 애청해 왔다. 그날 사라 브라이트만은 출연하지 않았지만 주옥같은 곡들, 환상의 무대 장치와 배우들의 명연이 어우러진 그때의 감흥이란….

하지만 12월의 뉴욕 날씨는 너무 추웠다. 공연을 보고 나오니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뼈 속 깊이 파고드는 대서양의 해풍을 느끼며 숙소가 있는 플러싱 한인촌으로 돌아왔다. 플러싱은 한국의 어느 지방에 와 있다는 착각이 들 만큼 한국적인 분위기였다. ‘고려당’ 제과점을 볼 수 있고 동일한 마크에 요즘 상가 간판에 유행하는 ‘Since-’ 문구도 눈에 들어왔다.

낯익은 제과점에 들러 ‘핫초코’를 한 잔 주문해 마시고 나니 한결 추위가 가시는 것 같았다. 편안해진 마음으로 계산대에 서니 예쁘장한 한국인 여점원이 눈인사를 했다. 나는 지갑에서 1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을 꺼내 카운터 앞에 내놓았다.

“손님! 이건 한국 돈이네요. 한국 돈은 안 받는데….”
여점원이 난처한 기색을 띠며 쳐다 보는 게 아닌가.
“아차! 참 여기는 미국이었지….”

너무 춥다가 한국과 흡사한 분위기 속에서 몸을 녹이다 보니 맘이 편해져 내가 잠시 미국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었다. 날씨가 무덥다 보니 겨울 생각이 절실하다. 올해도 겨울은 올 것이다. 겨울이 되면 가끔 뉴욕에서의 그때의 아름다운 기억들이 떠오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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