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명성황후

1995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비운의 국모 명성황후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으로 명성황후 시해 백주기를 맞이하며 제작, 기획된 초대형 창작 뮤지컬이다. 명성황후는 조선의 마지막 황후이며 16세의 나이로 고종과 결혼하여 국사에 큰 역할을 하다가 일본인들에게 정책적으로 시해 당하는 인물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정국이 어수선하여 각종 난과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던 시절이었고 그 가운데 일본의 한반도 지배 정책에 반하는 의사를 강경하게 펼치다가 비극적 사건은 일어난다. 아무리 국가적으로 적대적 감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한 국가의 국모를 살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건만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일본인들은 모든 역사적인 증거자료를 인멸해 버린다.


뮤지컬 <명성황후>는 한일 간의 아픈 역사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한 나라의 국모였지만 한 남편의 아내이자 어머니로써 그녀가 겪었던 죽음과 만국공통의 정서인 애국심이 결합하여 국제적인 문화상품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문열 원작, 윤호진 연출로 1995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올리면서 큰 성공을 거둔 후, 약 십여 년간 수차례의 업그레이드를 거쳐 오늘 날, TV드라마와 뮤직비디오, 출판, 음반, 광고 그리고 코미디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한국 대중문화 전반에 걸친 핵심코드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국내 공연문화 활성화와 해외 진출에 대한 초석 마련


<명성황후>는 1997년 최초로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 도전함으로써 한국 뮤지컬의 활성화와 해외진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당시 뉴욕 링컨센터 진출로 전회 기립박수와 「뉴욕타임즈」리뷰를 받으면서 좌석매진, 입석발매 기록을 세웠고 「뉴욕타임즈」로부터 ‘어떤 국적의 관객이건 감동받기에 충분하다’라는 평을 얻은 바 있다. 2002년 뮤지컬 <명성황후>는 런던 웨스트엔드에 진출하여 '용감한 도전'-「The Times」, '세계 수준' -「The Stage」 등의 평가를 얻어냈다. 현재까지 국내 각종 뮤지컬의 수출에 자신감을 불러일으켜 주면서 한국 뮤지컬 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해내고 있다. 2006년 10월까지 총 670회 공연이 올랐으며, 국내외에서 뮤지컬 <명성황후>를 관람한 사람들은 모두 92만 명이 봤다.

 

놓치고 싶지 않은 명장면!
<명성황후>는 십여 년 동안 쉬지 않고 보완되어 온 작품이다. 98년 뉴욕 LA 투어 공연 때 새로 삽입된 무과시험 장면과 무당굿 장면 등은 가는 곳마다 찬사가 끊이지 않는 명장면이다. 런던의 인디펜던트로부터 한국의 아름다움을 흠씬 전한 의상이라는 칭찬을 받았던 무대의상. LA 오베이션 어워드에 노미네이션 되었었으며 「뉴욕타임즈」로부터 신이 내린 빛과도 같다는 찬사를 받았던 조명. 이중 턴테이블로 마술과도 같은 무대를 창조했다는 런던의 이브닝 스탠다드의 극찬을 받은 무대. 명성황후가 결혼하는 초기장면부터 마지막 혼의 이름으로 부르짖는 피날레 곡 <백성이여 일어나라>에 이르기까지 <명성황후>는 오랜 시간 갈고 닦여진 빛나는 명장면들로 가득하다.

작품배경

일찍이 바깥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은자의 나라로 알려졌던 조선은 19세기 중반에 이르자 밀려오는 제국주의의 파도에 정처 없이 휩쓸리게 된다. 게다가 전통봉건체제의 붕괴에 따른 정치. 사회적인 갈등이 나라 온 구석에 팽배하여 조선은 더 이상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었다.

 

1864년 선왕 철종의 13살짜리 조카가 부친 대원군의 섭정하에 고종으로 등극하였다. 이년후 외척의 발호를 미연에 방치하고자 대원군은 부인의 6촌 민자영을 왕비로 간택하였으나, 먼 훗날 통한의 계기가 되고 말았다. 열렬한 국수주의자였던 대원군은 철저한 쇄국정책을 고수하여 밀려오는 서양 오랑캐를 물리쳤으나, 1873년 고종이 성년에 이르자 민비의 막후 조정에 의해 섭정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함으로서 조선은 오랜 은둔을 마감하고, 눈앞의 이익을 노리고 몰려드는 외국사절과 통상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하였다. 넘쳐드는 새로운 사상과 문물로 조선은 새시대의 문턱에 서게 되어 수구파의 끊임없는 반발속에서도 여러 가지 개혁을 시행하며, 1882년 미국과의 통상조약 체결을 필두로 여러 서양제국과의 협정이 잇따르게 되었다.

 

한편 수구파의 개혁에 대한 저항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민비는 모든 용납할수 없는 변혁을 초래한 장본인으로서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 되며 일본상인들의 간교한 농간에 자극되어 온 나라에 극심한 반일감정이 쌓여 가고 있었다. 1882년 임오년에 별기군 특별대우에 반발하여 구식군 병사들 이 난을 일으켜 일본인들을 살해하고 민비의 처형을 요구한다.


대원군은 다시 권좌에 오르고 민비는 변장한 채 피신하여 가까스로 죽음의 위기를 벗어난다. 청나라가 반란군 진압을 위해 파병 하자, 민비는 다른 방책이 없게 되어 부득이 원세개 장군과 내통하여 대원군을 청나라로 추방시키고 궁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후 십년간 조선을 무대로 펼쳐진 일본과 청나라의 각축전은 1894년 청일전쟁으로 절정에 이르나, 노쇄한 청나라는 떠오르는 일본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고, 다음해 시모노세끼 평화협정의 체결로 일본의 조선지배는 더 이상 피할수 없는 현실로 간주되기에 이르른다.

 

청일전쟁 중에도 일본은 갑오경장을 강요하여 고종은 군림을 하나 통치할 수 없는 처지에 있게 되었다. 1895년 정월, 고종은 종묘사직에 주권회복을 엄숙히 선선하고, 민비와 더불어 러시아,불란서, 독일을 회유하여 일본의 기득권 탈취를 골자로 하는삼국간섭을 성사 시킨다. 이에 따라 일본은 그들의 대동아 공영권 구축을 위한 중요교두보인 조선을 다시 잃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일본의 신임전권공사 미우라 고호로는 일거에 대세를 뒤집어 업기 위해 여우사냥이라는 작전명 아래 민비의 암살계획을 수립하고, 결국 1895년 10월 8일 새벽에 궁중수비대와 상궁들의 목숨을 건 저항에도 불구하고, 민비는 사무라이 다카하시 겐지의 칼에 의해 파란많았던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 민비의 서거소식이 알려지자, 백성들은 그들의 국모가 진정 어떤분이었으며, 무엇을 이루기 위해 애썼는지 깨닿게 되고 비통에 잠긴다.

 

미우라와 그의 일당은 일본으로 소환되어 형식적인 재판을 거친 후 모두 무죄로 방면되었다. 이후 구년간 조선땅에서는 러시아와 일본의 줄다리기가 이어졌으며, 1904년 러일전쟁으로 비화되었으나, 대마도 해협 해전에서의 결정적인 패배로 러시아는 무릎을 꿇게 되고, 1905년 조선은 일본의 보조국이 되었다. 이후 1910년 조선은 일본에 합병되고, 1945년 연합국의 승리에 이르기까지 36년간 일본의 통치를 받기에 이르른다. 민비는 1897년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바뀜에 따라 명성황후로서 추서되었다. 이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마지막 항거의 몸짓이었다.

 

시놉시스
서막
서곡과 함께 막이 오르면 1945년 8월 히로시마 상공의 거대한 버섯구름이 보인다. 무대가 밝아지면서 1896년 히로시마 지방법원의 민비 살해범 공판 장면이 나타난다. 재판장의 심문에 피고 미우라와 공범들은 일본천황에 대한 그들의 충성을 다짐할 뿐이다.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모두 무죄 판결을 받는다.

 

제1막
1장 - 1866년 봄 경복궁에서 고종과 민자영의 혼례가 이루어진다. 만백성의 축원속에 민비는 조선의 국모로서 고종을 성심껏 받들 것을 서약한다.

2장 - 조선을 섭정하는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고수한다. 한편 어린 고종은 궁녀들과의 희락에 도취하여 나랏일에 무심하다. 민비는 사랑과 질투사이에서 방황하나 지혜롭게 마침내 고종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

3장  - 무과시험에서 홍계훈은 장원에 오르고, 시위별감으로서 궁궐 수비 임무를 맡는다. 대원군은 세손이 없는 고종에게 후궁을 두기를 권유하고 민비는 무당 진령군을 불러들여 은밀히 굿판을 벌리며 득남을 기원한다. 한편 미국, 불란서, 독일의 상선이 문호개방을 요구하나, 대원군은 무력으로 그들을 쫓아 보낸다.

4장 - 천신만고 끝에 세자를 얻은 민비는 고종에게 친정을 펼칠 때가 되었음을 끈기있게 설득한다. 마침내 섭정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대원군은 훗날을 기약한다.

5장 - 수구파와 개화파의 당쟁사이에 고종은 번민하나 민비는 개화정책이 옳은 결정이었음을 설파한다. 눈앞의 이견을 노리는 세계 열강들 중에서 일본이 선택되고, 일본상인들은 교묘한 상술로 논간을 부린다. 구식군이 반란을 일으켜 일본인을 살해하고 민비의 처형을 요구하자 민비는 피신하고, 대원군이 권좌에 복귀하여 실종된 민비의 장례식을 치루기를 지시한다.

6장 - 고종은 민비를 그리워하며 살아있기를 기원한다. 청주 사가로 피신한 민비는 나라근심과 고종, 세자를 향한 그리움을 토로하고, 홍계훈은 민비에 대한 충성을 다짐한다.

7장 - 대원군은 원세개 장군에 의해 중국으로 추방되고, 일본공사 이노우에는 고종에게 반란군 괴수의 처형 및 보상금을 요구한다. 마침내 궁궐로 돌아온 민비는 고종과 함께 왕실을 지켜나갈 것을 서약한다. 일본수상 이토오 히로부미는 조선을 대동아 공영권 구축의 교두보로 삼는데 민비를 장애물로 지적한다. 이토오는 미우라를 소개하며 모두 천황에 대한 충성을 서약한다.

 

제2막
8장 - 12년후 1895년 봄에 경회루에서 갑오경장을 축하하는 성대한 연회가 열린다. 화관무가 끝난 후 고종은 외국사절들에게 새로이 태어난 조선을 축복해주기를 요청한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의기양양한 이노우에는 민비를 회유하려 하나 민비는 도리어  러시아를 끌어드리려 한다. 모두 조선의 미래를 위해 축배를 든다. 궁궐 밖의 아이들은 왜 때아닌 눈송이가 매화꽃 위에 내리는지 의아해 한다.

9장 - 이노우에는 훈련대를 양성하고 조선의 개혁을 지원하기 위하여 차관을 제공할 뜻을 표명하지만, 민비는 일본의 저의를 의심한다. 러시아, 불란서, 독일 대사들로부터 삼국간섭이 결정되었음을 알게된 미우라는 민비 암살계획을 서두른다.

10장 - 세자는 삼강오륜을 공부하고 고종과 민비는 세자의 앞날을 축복한다. 신임 일본정권 공사 미우라 고로는 고종을 알현하고, 조선의 앞날이 순탄할 것이라고 아뢴다. 그의 속셈을 간파한 민비는 일본에 이용당할 가능성이 있는 훈련대를 해산시킬 것을 고종에게 권유한다.

11장 - 민비가 불어를 배우고, 미우라는 '여우사냥' 작전개시를 선포한다. 외교관 부인들은 민비에게 일본의 횡포는 용납되지 않을 것 임을 다짐한다. 작전성공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다짐한 미우라와 낭인들은  천황을 위해 건배하며 '여우사냥' 의식을 거행한다.

12장 - 민비가 모처럼 세자와 행복한 망중한을 즐기고 있을 때, 홍계훈 장군이 궁성 주변의 이상한 동태를 보고한다. 민비는 의연하게 대응하지만,  불안한 홍계훈은 자신의 첫사랑인 민비를 위해 목숨을 내놓겠다고 맹세한다. 홀로 남은 민비는 왕비로 지낸 삼십년 세월에 대한 회한에 잠긴다.

13장 - 훈련대의 반란을 진정시켜 달라는 일본의 요청으로 궁궐 앞에 이른  대원군은 민비를 해치지 말라고 간청한다. 일본 낭인들이 궐안에 난입하고,  홍계훈은 이들과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최후를 맞는다.
상궁들은 민비의 피신을 간청하나 민비는 고종과 세자를 두고 갈수 없다며 거부한다. 낭인들은 민비의 처소까지 침입하여 민비의 소재를 밝히기를 거부하는 궁녀들을 참살한다. 마침내 민비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파란 만장한 일생을 마감한다. 세자는 오열하고, 고종과 대원군은 어쩌다 이런 비극을 보게 되었는지 탄식을 거듭한다.

 

맺음말
비탄에 잠겨있는 온 백성에게 민비의 혼이 나타나 모두 결연히 일어나 험난한 앞날에 맞서 줄 것을 당부하고 조선의 무궁을 기원한다. 막이 내린다.

 

공연일정

11월03일~04일 공주 / 공주문예회관 대공연장 / 3회
금요일 : 7:30PM
토요일 : 3:00PM, 7:00PM
공주무예회관 041-840-2467

 

10일~12일 대구 / 오페라하우스 
금요일 : 7:30PM
토요일 : 3:00PM, 7:30PM
일요일 : 2:00PM, 6:00PM
티켓링크 1588-7890 www.ticketlink.co.kr

 

25일~26일 천안 / 불당동 청사봉서홀
토요일 : 3:00PM, 7:00PM
일요일 : 3:00PM, 7:00PM
※주연급배우 팬 싸인회 : 25일 1회 - 26일 1회
티켓링크 1588-7890 www.ticketlink.co.kr

 

12월02일~24일 서울 /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화,목,금요일  : 19:30 
수요일  : 15:00 , 19:30 
토요일 : 15:00 , 19:00 
일요일 : 14:00 , 18:00 
※ 월요일 공연 없음
티켓링크 1588-7890 www.ticketlin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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