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탄산업 사양화, 그 뒤안길을 걷다 ⑦]-석탄공사, 그리고 퇴직

[이투뉴스 조찬제 편집위원] 공기업은 임금보다 퇴직금과 학자금 등 임금 외적인 후생복지의 메리트가 있어 일반 직장인들이 더 부러워하는 지도 모르겠다.

퇴직금은 10년 이상 근속을 하면 누진제의 혜택을 톡톡히 볼 수 있다. 필자도 10년 이상 근속해 퇴직금 누진제 혜택을 막 보려고 하는 데 정부 공기업 퇴직금 누진제도 폐지 지시에 의거해 그 제도가 사라졌다.

1년에 72일씩 누진되는 게 중간 정산을 하고 난 후에는 1년에 30일씩 일반 사기업처럼 증가하는 것으로 제도가 바뀌게 된 것이다. 우리는 모든 혜택에 제외된, 말 그대로 '재수 없는' 세대였다.

어찌됐든 퇴직 중간 정산금을 받았다. 처음으로 몫 돈을 쥐었는데 은행에 놀려 두기 아까워 공모주 주식을 시작했다. 필자가 처음 공모주 주식을 시작한 것은 광업소 신입사원 시절로 거슬려 올라간다.

근로자 증권저축은 근로자의 재산형성을 돕기 위해 근로자에게 정말 많은 혜택이 주어졌는데 오지인 장성광업소에서는 필자가 입사할 때까지 한 사람도 가입하지 않았는가 보다. 그 당시 태백시에는 증권회사가 한 곳도 없었으니 이런 좋은 제도가 광산 근로자에게는 빚 좋은 개살구였던 것이다.

필자는 삼척에 있는 증권회사에 근로자 증권저축을 가입했다. 그 당시에는 저축금액이 많지 않았고, 주식 공모회사가 많지 않아 배정받는 주식수가 얼마 되지 않아 큰 수익을 얻지 못했다.

석탄공사는 IMF 파고를 견디지 못해 본사 사옥을 매각하고, 증권거래소에 세 들어 살게 되었다. 회사는 어려운 역경에 처했지만, 역설적으로 퇴직금 중간 정산금을 받은 직원에게는 금융의 꽃인 주식을 배울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다. 

그 당시 코스닥 주식은 벤처시장의 붐을 타고 연일 급등하는 시기였다. 어떤 주식은 10일 이상 연속 상한가 행진을 이어갔다. 공모주만 많이 받으면 돈 버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조금씩 모은 공모주 수익이 월급 이상이었다.

힘 안들이고 버는 돈은 오래가지 못하는 줄 모르고 마냥 잘 벌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져 퇴직해 주식 전업투자가로 나서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 때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책이 유행했다.

부자 아빠가 되기 위해 수익이 창출되는 투자 활동을 하고 싶어 자판기 사업을 시작했다. 30000만원을 투자하면 월 150만원 고정 수익이 창출된다는 얘기를 믿고 주식으로 번 여윳돈을 투자했다가 큰 손해를 봤다.

그 사장과 같이 베트남까지 갔다 왔다. 베트남에 자판기 사업 및 수출을 할 계획으로 투자자 모집을 추진했다.  이것은 필자가 참여할 사업이 아니라고 판단해 더 이상 투자하지 않았다.

그 때까지 필자는 전세로 살고 있었다. 와이프는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이젠 이사 다니기도 지겨워 집을 구입해야겠다고 했다. 무슨 돈으로 사려고 하느냐고 하니까 은행 융자 받으면 된다고 하면서 알아서 할테니 간섭하지 마라는 식이었다.

남자의 자존심이 무너졌다. 여러 번 실수를 하다보면 경제권이 여자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은행 이자는 어떻게 갚느냐고 짜증을 내도 일체 대응을 하지 않는다. IMF 이후 부동산 가격이 상당히 뛰었다. 이젠 더 이상 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기대와 달리 부동산은 천정부지로 뛰기만 하는 것이다.

월급쟁이들은 전세금 올려 주기도 버겁다. 2년마다 이사 다니는 건 더 힘들다. 아무리 저축을 하려고 해도 요즘은 유치원부터 사교육이 시작되니 돈이 모일 틈이 없다.

집을 사고 보니 대출원금과 이자가 나가는 데 원금과 이자를 상환하고도 아파트 오른 값이 더 높았다. 그러니까 아파트는 공짜로 살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5년을 공짜로 살고도 지금 집을 팔면 돈이 남는 희한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투자라고도 하고, 재테크라고도 한다.

여의도 본사와 필자의 집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다. 여의교 다리만 넘으면 되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어느 날 퇴직한 회사 선배가 다리 근처에서 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그렇게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는데 같이 갈 곳이 있다면서 함께 가보자고 했다.

이것은 틀림없는 다단계 사업인 것 같았는데, 매일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한 번 따라 가보기로 했다. 다단계 판촉 강사들의 화술에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안 넘어가는 경우가 없을 것이다. 상위직급으로 승진한 사람들이 폼 잡고, 그들의 성공담을 얘기하면 기죽지 않을 월급쟁이들이 어디 있을까.

이것이 화근이다. 모두들 일확천금을 빨리, 왕창,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한 번에 벌려고 하는 묘한 심리가 있는 것 같다. 선배가 지원하고, 상위 스폰서가 자기 일처럼 도와주겠다고 하니 마음이 동했다.

회원 가입자격은 80만원 이상 물품을 구매하는 것이었다. 맨 아래 단계부터 시작하는데 하위 직급 수수료는 보잘 것 없는 금액이었다.

이 사업이 될 수 있는 사업인지 확인하기 위해 자판기 사장에게 전화카드 구입을 부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필자에게 투자금을 더 받기 위해 상당액을 구입해 주었던 것 같다. 어째든 힘들이지 않고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처음 시작할 때 쉽게 성공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한다. 그 다음에 다른 지인이 80만원 상당액을 구매해 주어 하위 스폰서를 두게 되었는데, 지원해 주기로 한 상위 스폰서의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들 모두 한계 상황에 몰려 있었다. 마지막 발버둥을 칠 때에 운 좋게 필자가 걸려든 것이다. 카드를 사용하기가 너무 불편해 공짜로 주어도 사용하지 않겠다고 하니, 이 사업은 더 이상 버텨낼 수가 없었다.

두둑한 수업료를 또 지불하고 중도 하차했다.

하는 일마다 실패를 계속하다 보니, 꿈과 희망이 사라지고 의욕도 사라졌다. 회사는 아무리 경영정상화를 꾀해도 한 번 빠져들어 가는 깊은 수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새로운 경영진이 들어오면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싶어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그들은 처음이라 의욕적으로 새 사업을 시도해 보지만 직원들은 수차례 겪은 일이라 그들에게는 새로운 것이지만 직원에게는 그게 다 비슷한 그렇고 그런 일인 것이다. 몇 번 시도해 보고 되지 않으면 그게 그것처럼 보여서 근성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필자가 대북사업을 시작할 때도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또 귀찮은 업무가 더 늘어나는 것 같았다. 할 사람이 없으니 필자에게 떠 맡겨진 짐처럼 느껴졌다. 필자 자신도 이 사업의 성공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직원들은 오죽했을까.

천운이 있었든지 이 대북사업은 직원들의 기대와는 달리 성과를 창출해 내었다. 대북사업 총괄실무를 맡은 필자가 북한에 연탄 전달 실무협상을 위해 금강산에 첫 발을 들어놓을 수 있었다. 연탄전달을 위해 여러 차례 북한을 드나들게 되었으며, 본의 아니게 대북사업 전문가 대우를 받게 된 것이다.

북한자원과 에너지 관련 포럼 및 세미나에 참여할 기회가 생겼고, 이런 일을 하다 보니 지식과 경험의 폭을 더 넓힐 수 있었다. 이런 게 계기가 되어 많은 대북사업자를 자연스럽게 접촉할 수 있었으며 여기에서 앞으로 먹고 살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싶었다.

그 선택을 잘 한 것인지는 아직은 모르겠지만 그 당시 부업으로 시작한 대북사업이 퇴직하면서 본업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남북상황 악화로 계속하지 못하고, 다니던 회사를 또 그만두게 되었다.

새로운 직업을 찾는 투어를 지금도 하고 있는 데 지금 찾은 일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그것은 신뢰받는 부동산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꼭 하고 싶은 일이기도 했고, 후반기 제2의 인생을 위해 평소 틈틈이 준비를 해두었었다. 좋은 결실을 맺을 것으로 확신하며, 잘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다.

<조찬제 편집위원의 글은 격주로 온라인판에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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