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탄산업 사양화, 그 뒤안길을 걷다-석탄공사편 ⑥]

[이투뉴스 조찬제 편집위원] 석탄공사 광업소 오지의 근무생활은 너무 단조로웠다. 아침 8시 출근해 오후 5시면 업무가 끝난다. 회사가 성장 동력이 있어 앞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다면 그 속에서 자신들의 발전 가능성을 찾겠지만, 석탄 산업은 성장 동력이 고갈돼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그런 시기였다.

동물적 감각으로 다른 곳에서 기회를 찾아나서는 선배들이 많아졌다. 신입사원 공채를 매년 실시하다가 87년 필자 입사 이후 88년에 후배 기수를 한 번 더 뽑고 신입사원 채용을 중단한 것이다. 필자 동기들도 하나둘 나가기 시작했고, 후배 기수들이 '이게 아니다' 싶었는지 얼마 되지 않아 모두 다 나가고 만 것이다. 

군 생활을 지낸 분들은 잘 알겠지만 졸병이 들어오지 않으면 졸병이 들어올 때까지 일병, 상병으로 승진을 해도 졸병 신세를 면할 수가 없다. 필자가 꼭 그런 상황이었다. 선배가 퇴직하는 것은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지만 후배가 빠져 나가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더 좋은 기회를 찾아 용기있게 나가는 후배가 인사를 하려 올 때면 '선배는 능력도 없고, 용기도 없어서 여기서 마냥 웅크리고 있는 거지?'라고 비웃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광업소에서 다른 일을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대도시로 나가든지, 다른 회사에 재입사를 해야 한다.

필자는 입사 때 3개월만 현장에서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오면 본사 수입부에 근무하다가 미국지사로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 3개월이 3년이 될 때쯤 본사로 올라오겠느냐는 연락이 왔다. 3년이란 세월은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는데, 당시는 경력사원 채용이 일반화되어 있지 않은 시절이라 3년은 다른 회사 전업이 막혀 버리는 중요하면서도 긴 기간인 것 같았다.

광업소 생활 때 처음 시작한 '부업(side job)'은 모 신문사 기자였다. 대학교 편집실 근무 경험을 살려볼 생각으로 지원했는데 합격한 것이다. 뭔가 지푸라기라도 잡아볼 간절한 심정이었다. 서울에서 오리엔테이션을 받았다. 그런데 참가자격은 10만원의 회사 주식을 매입하는 것이다.

수백명에게 주식을 팔았으니 그 당시의 돈으로 환산하면 꽤 큰 돈 이었을 것 같다. 필자는 강원도 태백 주재기자였다. 직접 취재해 송고를 했는데 보수는 없었다. 신문 구독자를 많이 확보한 기자에게 기사게재 기회를 더 주었고, 전체 모임 시 그런 사람을 모범사례로 소개해 서로 경쟁하게 만들었다.

필자도 구독 실적에 대한 부담을 느꼈다. 자재과에 있을 때였으니 업체 사장이 '용돈'을 주고 가면 그 돈으로 신문을 구독 신청해 준 적이 있었다. 이 직업은 적성에 맞지도 않고, 용돈을 벌 수가 없었으며 장래성도 없어 중도 포기했다.

주식 10만원어치를 돌려달라고 하니, 이런 저런 이유를 대고 돌려주지 않다가 나중에는 그 회사가 사라져 버린 것인지 연락이 되지 않아 돈 벌려고 하다가 몸과 마음까지 상하고만 사례였다. 그 다음 한 일은 손해 보험 대리점으로, 전직 경험을 미리 쌓으려는 요량에서 시작했다.

자격증을 받기 위해 서울에서 집합 연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영업소장과 면담을 했다. 서울에서 교육을 받지 않고, 자격증 취득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이제까지 연수받지 않고 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면서 곤란하다고 했다. 일주일 휴가를 받을 수 없으니 좋은 방법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영업소장은 본사와 상의했는지 자격 취득 관련 책자를 구해 주었다. 자신의 체면이 손상되지 않도록 열심히 해 꼭 합격해야 한다고 했다. 서울에서 시험을 치렀다. 60점 이상이면 합격하는 그렇게 어려운 시험이 아니었다. 연수를 받지 않고 합격한 첫 사례라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아 필자가 송구스러울 따름이었다.

손해 보험 업무를 시작했다. 업체 사장들은 가능하면 필자에게 가입해 한 달에 한두 건 실적을 올릴 수 있었다. 꽤 괜찮은 용돈을 벌 수 있었다. 이 일을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 부산으로 내려가게 됐다. 첫 발령을 받고 일을 계속하기 어려워 잘 아는 친구, 친지들 물건만 취급했다.

1990년대 부산 경기는 안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경력사원으로 응모했지만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젠 월급쟁이 생활은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였다. 보험 대리점에 승부를 걸고, 생명보험 대리점 자격을 또 취득했다. 생명보험이 실적을 내기는 어려운 반면에 손해보험보다 대리점 수수료 및 수당이 더 좋았다.

보증보험 대리점 자격까지 취득해 명실상부한 종합보험대리점을 구축한 것이다. 회사 업무에 병행해 손해, 생명, 보증보험 대리점을 모두 취득했다. 독립준비를 끝낸 것이었다. 그러나 신은 또 필자에게 '운명의 장난'을 걸어왔다.

영업실적도 괜찮게 올라오고 창업 선언 앞둔 시기에 손해보험 영업소장이 괜찮은 이자를 줄테니 돈을 빌려 달라는 것이었다. 가계수표를 발행해 주니 돈 떼일 염려는 전혀 없는 줄 알았다. 이자와 영업수당이 착착 들어왔다. 필자의 인생도 이제부터 활짝 피는가 보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 잘 나가던 영업소장이 어느 날 출근하지 않았다. 사무실 분위기가 어수선해 알아보니 사채를 갚지 못해 도망갔다는 것이다. 지금 손해보험회사에서 그 일 때문에 본사 감사를 받는다면서 필자도 피해가 있으면 상담을 해보라는 것이다.

앞이 아찔했다. 실력 있고, 학벌 좋고, 신용을 생명으로 하는 보험회사 영업소장이 보험 대리점주에게 빌려 쓴 돈을 갚지 못해 도망을 가다니. 이것에 대해 보험회사가 응분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회사에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했지만 회사 측은 “큰 손실을 끼친 점에 대해서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인간의 거래라 회사가 책임을 질 사안이 아니다. 오히려 회사도 큰 피해자다”라며 전혀 보상해 주지 않았다.

이때 입은 손해는 필자가 감당하기 너무 커서 독립의 시기는 자꾸 뒤로 미뤄지고 말았다. 보험 대리점 영업으로 생활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아 필자가 맡고 있던 보험 관련 물건들을 다른 분에게 양도하고 이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그 당시 암웨이를 비롯한 다단계 비즈니스가 인기를 끌었다. 선배가 회원제 카드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N 화장품 다단계 회사와 제휴해 본격적인 일을 추진하려고 하니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해보자고 제의를 했다.

어느 분야든 그런 일에 미쳐 있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설명회에 여러 번 참석했는데 다른 사람보다 먼저 시작하면 선점 효과가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선배 카드회사가 집중적으로 후원한다면 가능성이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선배가 파격적인 제의를 했다. 자금을 선투자하면 월 5%씩 투자 수익으로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적은 돈으로 한 번 시작해 보자는 것이다. 그의 영업전략을 설명해 주었는데, 손해나는 장사가 아닌 것 같아서 투자하게 됐다. 매월 5%씩 실적이 없는데도 수수료가 들어왔다.

필자와 와이프가 조금씩 영업실적을 내니 수당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었다. 이 사업이 선배의 생각대로 이행되지 않은 것인지 몇 달 후 더 이상 수당을 제공할 수 없고, 화장품 제휴 사업을 중단해야겠다고 말했다.

투자금을 자신의 회사가 받은 게 아니고, 다단계 회사가 자신의 회원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겠다고 해 공동 사업을 하게 되었는데 실적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투자금을 그 회사에서 받아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선배에게 따질 수도 없었다.

이 일에 참여했던 화장품 회사 상위 스폰서는 젊은 부부였다. 정말 열심히 했지만 자리를 잡지 못하고, 고생만 하는 것 같았다. 투자금을 돌려 달라고 하니 돈이 없다면서 화장품을 가져가라고 했다. 화장품 값이 꽤 비싼 편이었는데 와이프에게 정말 많은 화장품을 선물로 안겨 주었다. 너무 많아 두고두고 사용했으리라.

<※ 조찬제 편집위원의 글은 온라인판에 격주로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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