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탄산업 사양화, 그 뒤안길을 걷다-석탄공사편 ⑤]

[이투뉴스 조찬제 편집위원] 석탄공사는 1988년 520만톤 가량의 석탄 생산량을 정점으로 급격히 생산량이 감소했고, 이는 곧 조직의 축소로 이어지면서 적자 광산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전광업소는 1990년에 폐광을 했다. 필자는 남은 자재를 인수하기 위해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강원도 도로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같은 강원도 태백에서 정선까지 다녀오는데 하루가 걸렸다. 비가 내려 운전자가 조금만 방심해도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은 길이었다.

나전광업소를 비롯해 성주, 영월, 함백 등의 광업소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적자 광업소 폐광과 더불어 가행 탄광뿐만 아니라 본사를 비롯한 지사 및 사무소의 구조조정도 뒤따랐다.

1987년과 1988년의 종업원 집단행동은 석공의 진로에 큰 전환점이 됐다. 석탄 산업은 총비용 중 인건비가 70% 정도를 점하고 있었다. 1987년 이전 근로자들은 자신이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을 받지 못하고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관리직이 시키는 대로 묵묵히 열심히 일만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집단행동 이후 의식이 변화하면서 관리직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생산량에 따라 임금을 지급하는 도급제에서 월급제로 부분 변경됐다. 목숨 걸고 죽기 살기로 열심히 일을 하지 않으니 생산성은 떨어지는 반면, 종업원 복지와 안전에 대한 비용은 더욱 늘어나게 된 것이다.

정부는 석탄산업 사양화를 대비해 석탄산업 합리화 사업을 시작했는데, 너무 서두른 탓에 부작용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광업소 폐광은 종업원의 일자리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광업소와 더불어 탄생한 광산도시의 쇠락을 불렀다. 이렇다보니 지역주민이 더 광산 합리화를 반대했다.

합리화 부작용에 대한 대책으로 정부는 5년간 한시적으로 연간 100만톤씩 500만톤을 정부 비축탄으로 구매했다. 그 비축 사업을 석공이 대행했다. 처음에는 광업소가 소재하는 장성, 도계, 화순에 저탄했다. 산지 저탄량이 더욱 늘어나 광업소 주변에는 더 이상을 석탄을 쌓을 부지가 없어졌다.

부산지사에 근무할 시기에 새로운 저탄장을 구하기 위해 여러 지역을 다닌 적이 있다. 적당한 저탄장을 찾는다 해도 땅값이 떨어진다며 지역주민이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석탄과 연탄이 산업의 흑진주로 각광받아 오다가 졸지에 천덕꾸러기가 된 것이다.

기존 저탄장인 인천, 석항, 옥마, 와룡, 정동진, 대구 달구벌 저탄장에 쌓을 수 있는 최대량을 쌓아두었다. 정동진은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인근지역으로 이전했는데, 그 석탄을 반영구적으로 보관하기 위해 석탄 위에 흙을 덮어 보관하기도 했다.

이렇게 애물단지로 전락한 석탄이 IMF를 지나면서 석유값이 급등하고, 가계 살림이 빠듯해지면서 연탄소비가 더 이상 줄지 않고, 오히려 늘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비닐하우스 난방용, 영세 사무실용 및 추억의 연탄구이용으로 사용량이 더 늘기 시작했다.

생산량은 250만톤이지만 소비량은 발전용이 250만톤이고, 가정 연료용이 200만톤이라 해마다 200만톤의 공급부족량이 발생했다.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그 많은 저탄량이 점점 줄어 연탄 파동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비축탄이 줄고 만 것이다.

이 부족한 석탄을 채우기 위해 수입이 불가피했는데 제3국에서 수입하는 것보다 북한에서 가져오는 게 남북이 공생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북한탄 수입에 많은 공을 들였다.

필자는 장성광업소 자재과에서 3개월 정도 근무하다 순환 근무를 위해 송무과로 옮겨갔다. 송무과는 소송 및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다친 공상 환자 관리, 땅속에서 일을 하다 보면 석탄가루를 많이 마셔 폐가 나빠져고생하는 진폐 환자를 관리하는 부서다.

송무과에서 7개월 가량을 근무했는데 매월 1건씩 순직사고가 발생했다. 석탄 증산을 위해 안전을 소홀히 한 탓일 것이다. 종업원들의 집단행동 시 여러 요구 사항 중에는 관리직이 너무 많으니 부서 및 인원을 줄이라는 요구도 있었다. 이 시기 송무과는 노무과에 병합돼 송무계로 축소됐다. 입사 1년도 되지 않아 조직 축소의 쓰라린 경험이 시작된 것이다.

갱내에서 근무할 때 관리직은 백색 안전모를 쓰고, 기능직은 황색 안전모를 썼다. 관리직에 대한 거부감이 많았던지 백색 안전모를 없애자는 요구가 들어왔다. 황색 화이버('화이버'는 안전모의 속어)로 통일되었다가 나중에는 상하 구분이 잘 되지 않아 백색 화이버가 재등장했다.

필자는 '안 팔리는 석탄을 팔기 위해' 부산지사에 판촉요원으로 내려갔다. 당시 부산지사는 무연탄 수입 및 판매, 석탄 수송 업무를 맡고 있었다. 산업용 괴탄은 수요가 있었으나 괴탄에서 발생하는 분탄을 처리하기가 곤란하고 국내산 분탄이 수요급감으로 판매할 곳이 없어 수입업무를 중단하게 됐다.

태창호라는 5000톤급 선박으로 해안 도서지역에 석탄을 운송했는데 연탄소비 급감으로 태창호 마저 갈 곳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석탄외 다른 일반화물을 실어 나르기도 했지만 도저히 수익을 낼 수 없어 결국 매각했다. 구조조정을 계속하다 보니 부산지사는 대구사무소와 합병돼 영남사무소가 됐다.

그 많은 직원이 소장을 포함해 6명만 남았다. 이때 대구 사무소 정리 인수를 필자가 맡았다. 사무소장과 담당과장 2명 모두 사직했다. 대구사무소는 석탄을 판매하기 위해 만든 사무소라 인계를 받을 서류와 물품도 없었다. 임대로 살던 곳이었다. 부동산 중개업소에 임대 의뢰해 처리하고 중요서류만 부산으로 가져 온 것으로 기억한다.

영남 사무소는 인원을 3명 더 줄여 직원 3명만 남게 되었다. 필자와 다른 직원은 서울 본사로 발령받고, 나머지 1명은 강원도로 발령났다. 서울에 아무 연고가 없었다. 15년 근속연수가 된 직원들이 받는 명예퇴직금과 필자와 같이 15년 근속기간이 안된 직원이 받는 희망퇴직금과의 차이는 천양지차였다.

조그만 더 참고 명예퇴직금을 받고 나가기로 결심하고 본사 자재과 발령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 지루한 구조조정은 끝이 없었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들이 물러난 자리에 필자가 들어갈 기회가 올 것 같았다. 퇴직 대상자 명단에 들어갈 수도 없었지만 이제까지 기다린 것이 아까워 더 기다려 보자는 생각으로 1998년 구조조정은 눈 딱 감고 넘겨 버렸다.

2000년 영남사무소는 폐쇄됐다. 이 때도 정리 인수에 필자가 참여했다. 사옥을 매각하고, 인근 사무실로 임대로 들어갔다가 다시 부산 수영로터리 근처에 있는 조그만 사무실에 둥지를 틀 시간과 기회도 없이 영원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경리부 직원과 같이 내려갔는데, 인계해 줄 직원들이 모두 퇴직했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서류만 챙기고, 나머지 서류는 돈 주고 폐기물로 처리했다. 퇴직직원과 저녁이나 먹고 온 것이다. 필자가 맡은 자재, 영업, 수입 관련 서류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본사 창고에 쌓아 두었지만 찾는 사람이 없었다.

석공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인 여의도 본사 사옥까지 팔아치우고 증권 거래소에 셋방살이로 들어갔다. 임대주인 증권거래소는 공사인 석공이 부담스러웠는지 임대기간 연장을 해주지 않았다. 석공은 오갈 곳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됐다. 수색 저탄장에 창고 및 사무실 용도로 쓰는 건물을 개보수해 그 곳으로 이전했다.

그 임시막사도 오래가지 않아 재개발이 되었다. 가난한 임차인이 2년마다 이사를 하는 것처럼 석공은 사옥도 없어 이리저리 떠도는 신세가 됐다. 지금은 혁신도시 계획에 맞춰 강원도 원주로 먼저 내려갈 수가 없어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광산노동조합 건물에 임시 둥지를 틀고 있다. 공사가 사옥이 없어 노동조합의 건물에 세 들어 사는 신세라니, 주인이 머슴 집에 세들어 사는 처량한 꼴이 된 것 같다.

이 곳도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 지 모르겠다. 다른 공기업은 혁신도시로 이전하기 위해 부지 물색을 거의 다 끝냈다고 하는데 석공은 지방으로 내려가면서 자체 사옥을 갖지 못하고 남의 건물에 임대로 들어가야 하는게 아닌지 한편으로 처연하다.

< ※ 조찬제 편집위원의 글은 다음호부터 격주로 온라인판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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