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자원협력 비화-석탄공사편④] 석탄산업 사양화, 그 뒤안길을 걷다

[이투뉴스 조찬제 편집위원]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순간순간 퇴직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을 것이다. 필자도 22년간 공기업 생활을 하면서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던 사건들이 여러번 있었다. 

필자의 첫 발령지는 강원도 태백에 있는 장성광업소였다. 1987년에 입사했는데 당시만 해도 대졸사원은 지역에서 좋은 대우를 받았다. 광업소 직원은 관리직과 노무직(소위 광부)으로 나눌 수 있는데, 관리직이 노무직보다 상대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은 것 같다.

광산에서는 20년 정도 나이 차이가 나도 김씨, 이씨 등의 호칭을 불려도 되던 관리직의 호시절이었다. 갓 입사한 필자는 자재과, 송무과, 노무과, 경리과에 순환 근무를 하다가 자재과에 고정 배치를 받았다.

자재 불출 관계로 노무직원과 자주 접촉했느데, 그들은 갓 입사한 필자에게도 눈치를 보며 어려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전국적으로 민주화 바람이 일었는데 산골 벽지인 강원도 태백 광산촌도 예외가 아니었다.

광부들은 이제까지 억압받은 분노를 집단행동으로 분출했는데, 소장을 비롯한 관리직은 평소에 그 당당한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집단 폭행이라도 당할까봐 데모 현장에 얼씬도 못하고 도망만 다니는 신세였다. 사무실 유리창이 깨지고, 간부 사택으로 몰려가 닥치는 대로 깨고 부수니 겁이 났던 모양이다.

이런 실력행사로 관리직의 권위가 한껏 실추되고 직원 처우가 현장 직원 위주로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함께 입사했던 동기들은 광산 사양화 추세를 빨리 파악하고, 하나 둘 짐 보따리를 싸기 시작했다.

그후 1988년 한번 더 집단행동이 있었다. 이때부터 노조가 경영진의 권한을 하나 둘 챙기기 시작했다. 관리직은 노조의 눈치를 보고, 더 약삭빠른 자들은 노조에 줄을 대기 시작했다.

노조는 현장 노조원을 더 대우해 주고 싶었을 것이고, 점점 위축된 석공은 신입 사원들에게 당연히 해줘야 할 몫도 챙겨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입사 조건대로 하면 대졸 4급은 입사 후 2년이면 3급이 되어야 하는데, 기존 직원 배려 차원에서인지 당연 승진에서 승진 시험이 새로 생겼다. 그 승진 시험이 재미 있었다. 시험성적 200점이면 근무평정 점수가 300점이었다. 시험을 아무리 잘 치루더라도 소장의 '내신등급'을 잘 못 받으면 승진이 불가능했다.

필자도 승진 시험을 두번이나 치렀다. 처음에는 당연히 떨어질 것으로 예상하였기 때문에 불합격에 대해 불만이 없었다. 그런데 두 번째 시험은 잘 치루기도 했고, 이번에는 승진 순서를 따져도 우리 동기들이 승진할 차례였기도 했다. 상사가 본사에 알아보고 기대해도 되겠다고 얘기까지 해주니 내심 기대가 컸다.

하지만 승진 발표는 계속 뒤로 미뤄졌다. 노조가 개입해 승진대상자를 조정한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기다리고 기다렸던 승진 대상자 명단에 필자의 이름은 없었다. 마침 그 날이 자재과 망년회 날이었다.

많은 간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필자는 철재 책상을 발로 걷어 차 버리고 퇴직을 선언했다. 하지만 막상 자리를 박차고 나와도 갈 곳이 없었다. 신혼살림을 차린 지도 얼마되지 않았다. 자초지정을 듣고도 아내는 기가차지 않았나보다.

다행히 신정 연휴기간이라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는 냉각기간이 있었다. 연휴가 끝나고, 신년 첫 출근을 했지만 망년회 때 있었던 일을 모두 까맣게 잊어버린 듯 그 날의 사건에 대해 아무도 얘기하지 않았다. 며칠간 자숙하듯 시간을 보냈다. 아무도 그 사건을 다시 꺼내지 않았다.

아내는 회사를 그만두더라도 갈 만한 자리를 잡아두고 가는 게 좋겠다며 "지금은 속이 쓰리고 아프더라도 참고 더 다니는 게 좋겠다"고 설득했다. 이후 필자는 사정 끝에 부산지사 발령을 받았다. 석탄공사가 잘 나가던 시절에는 부산지사 직원(선원 포함)이 100여명이 넘었고, 선박이 3척이나 됐다고 한다.

필자가 부산에 근무하던 시기에는 5000톤급 석탄 전용선인 태창호 선박 1척만 남아 있었다. 없어서 못 팔던 석탄이 연탄수요 급감으로 남아 돌았다. 석탄을 쌓아둘 저탄장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고, 석탄이 팔리지 않으니 자금이 들어오지 않았다.

1987년 입사 시 석탄 생산량이 최고점에 달했는데 1988년 올림픽을 계기로 석탄 수요가 1년에 25%씩 줄어들었다. 남아도는 석탄을 팔기 위해 판촉요원으로 부산지사로 갔으나, 지사 직원도 남아 정리해야 될 판이었다. 안 팔리는 석탄을 억지로 판다고 팔릴 일은 아니었다.

민영탄광, 특히 경동탄광도 석탄이 안 팔리자 대폭 할인 판매를 하기 시작했다. 공기업인 석공은 막대한 적자를 감내하고 할인판매를 할 수 없으니 민영탄광이 연탄공장에 석탄을 다 팔고 난 후 나머지 수요를 석공이 채워주는 식이었다.

'할 일이 없으면 하는 게 싸움'이라고, 회식이라든지 행사 때마다 사고가 터지곤 했다. 필자에게도 신이 운명의 장난을 걸어온 것 같다. 점심시간으로 기억한다. 간부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 심각한 상황에 눈치도 없이 바둑 훈수를 한번 했다.

하지만 그 훈수가 그에게 불리했던지, 바둑이 끝나고 난 뒤 벌떡 일어나 필자에게 욕을 하면서 가슴을 쥐어박고 발로 다리를 걷어차는 것이었다.

많은 직원들이 보는 데서 일어난 돌발 사고였다. 당황스러웠다. 이런 모욕을 당하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 지 동료 직원과 상의했다. 모두가 격분했고, 없던 일로 하면 안 된다고 했다. 나이가 많은 직원이 노조 지부장에게 얘기하라고 충고했다.

지부장에게 전화로 얘기했더니 메모로 적어 보내라고 한다.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몰랐던 것인지 그가 지시한대로 써 보낸 그 간단한 메모가 태풍의 눈이 됐다.

인사과에서 상황 파악에 나섰다. 이게 아닌데 후회를 했지만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일이 커졌다. 또 다시 퇴직을 준비했다. 이 시기에는 상시 명예퇴직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실시되곤 했다. 명예퇴직 근속연수가 15년 이상이었지만 필자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았다.

본사에서 인사발령이 났다. 강원도 탄광으로 다시 갈 줄 알았는데 부산에 그대로 남았다. 대신 사건에 대한 문책성인지 간부 두 분은 태백 훈련소로 발령이 났다. 그 두 분 역시 억울했던지 즉시 사직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 순간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두 분에게 되돌릴 수 없는 피해를 입힌 것 같다.

이 자리를 빌어 그 분들께 진심으로 사죄를 올리고 싶다.

석공은 2년마다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대상자 조건이 완화됐다. 2000년에는 필자도 명예퇴직 대상이 됐다. 목돈에 욕심이 난 것도 있지만 난파선 같은 '석공호'에서 빨리 뛰어내리지 못해 안달해하는 분위기에 편승해 사직서를 제출했다.

관리이사가 면담을 제의했다. 입사 동기 두 명이 퇴직신청을 했는데, 한 사람은 승인을 해 주겠다고 했다. 마음좋은 입사 동기는 연대보증을 많이 서 목돈이 필요하다며 이번 명예퇴직을 자기에게 양보하라고 했다. 석공은 명예퇴직금이 있어 서로 퇴직하려 한다.

그의 사정이 필자보다 딱한 것 같아 퇴직을 양보했다. 2002년 다시 명예퇴직이 있었다. 이번에는 아예 퇴직 신청을 하지 않았다. 그 후 한동안 명예퇴직이 없다가 2008년에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하게 됐다. 1차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꼭 내보내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3월 31일로 기억한다. 퇴직 처리가 되고, 퇴직하는 분들과 함께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임원실에 들어갔다. 부사장은 필자에게 퇴직이 반려될 것이라고 했다. 이미 퇴직처리가 되었는데 퇴직 반려라니, 농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사장도 같은 얘기를 했다. 뭔가 잘못 된 게 있는가 싶어 한편으로 걱정이 됐다.

내보내 달라고 사정을 했지만 안 된다고 한다. 대북사업팀도 해체되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을 하라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북사업 투자에 대한 인질로 잡아 두려고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근무하는 대신 몇 가지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승진을 시켜서 서평에너지에 파견근무를 보내 달라고 했다. 대북사업 명맥을 유지시키기 위해 그렇게 해주겠다고 사장 이하 전 임원이 승낙했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나도 승진소식은 없었고, 그 사이에 사장이 중도 퇴진했다. 어느 날 이사가 필자를 불러 퇴직과 파견근무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필자를 생각해주는 것처럼 얘기를 하는데 당초 약속을 이행할 생각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퇴직을 결심했다. 22년 눈물 서린 공기업 생활은 그렇게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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