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공장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는 중국. 세계 어디서든 쥐약부터 운동화, 가전제품까지 '메이드인차이나' 제품이 시장을 휩쓸고 있다.

 

중국의 초고속 경제성장은 수많은 공장 굴뚝 덕분이기도 하다. 한편 그 결과 중국은 두가지 짐을 지게 됐다. 에너지에 대한 수요가 매년 급증하면서 에너지 안보와 환경오염 문제가 불거진 것.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도 최근 성장속도가 지나치게 빠른 것을 직시하고 에너지, 환경문제 등을 해결해야 할 당면과제로 제시했다.

 

◆지속가능한 경제…일본, 유럽 등 선진 기술 협력

교토의정서를 대체할 포스트 교토의정서에 중국이 가입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지난해 12월 발리에서 열린 제 13차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중국은 뒷짐만 진 채 온실가스 감축안 참여에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후진타오 주석은 환경 문제를 '과학'으로 풀어볼 태세다. 일본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었다. 일본의 수준 높은 기술력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국내총생산(GDP) 1달러당 소모 에너지가 중국의 8.7%에 불과한 일본의 에너지 절약 기술은 중국이 특히 탐내는 분야다.

 

지난해 12월 1일 중국은 일본과 '협력을 통한 공동 번영과 상호 협조 속 발전'이라는 주제로 고위급 경제대화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양국은 환경 보호와 식품 안전을 위해 경제적 유대를 더욱 강화하기로 했다. 동중국해 가스전 공동개발 문제도 조만간 합의하기로 했다. 중국은 "상호 공동의 이익을 위해 협력의 방식과 수준을 높이자"며 강한 협력 의지를 밝혔다.

 

중국 정부는 오는 3월 유럽과 고위급 경제대화를 할 예정이다. 이어 4월엔 후진타오 주석이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할 계획이다.

 

◆자원외교로 에너지 수입 다변화…아프리카, 태평양지역

자원 확보를 위한 후진타오 주석이 행보가 눈에 띈다. 후 주석은 2006년 4월 18일 미국과 아시아, 아프리카 4개국을 순방, 7월 15일 8개국 정상회담 참석, 11월 15일 아시아 4개국 순방, 7월 15일 8개국 정상회담 참석, 11월 15일 아시아 4개국 순방, 지난 2007년 1월 30일 아프리카 8개국 순방을 했다. 주로 석유와 석탄, 광물이 몰려있는 곳으로 방문지가 집중됐다.

 

특히 아프리카를 향한 후 주석의 애착이 강하다. 2006월 4월, 6월, 2007년 1월 등 후 주석은 아프리카를 찾았다. 2006월 11월에는 아프리카 48개국의 정상과 정상급 지도자를 수도 베이징으로 불러들였다. 중국이 아프리카에 집착하는 이유는 자원 때문이다.

 

중국은 2006년 아프리카에서 하루 77만1000배럴의 원유를 수입했다. 후 주석이 4월 모로코, 나이지리아, 케냐 등 산유국을 돌아봤다. 그를 이어 원자바오 총리도 이집트, 앙골라, 콩고 등을 찾았다. 그 결과 중국은 나이지리아를 포함한 아프리카의 4대 산유국을 대거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 외 방문국들도 자원 보고다. 가나는 금과 원목,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백금과 크롬, 탄자니아는 금, 우간다는 구리와 코발트가 풍부하다.

 

중동과 태평양의 거점을 확보하는 데도 일익했다. 후진타오 주석은 지난해 4월 사우디아라비아와 송유관 건설에 합의했다. 이란과 1000억달러 규모의 에너지 협력협정을 추진했다.

 

해외 에너지원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후 주석은 에너지 관련 전담 부서를 만들었다. 또 안정적 수송방안으로서 파이프라인의 공급 확보, 산유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전방위 외교를 벌이고 있다. 1조달러가 넘는 보유 외환을 활용해 전략적 가치가 높은 희귀 자원을 비축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후진타오는=1942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1959년 베이징의 칭화대학교 수리공정과에 진학해 하천발전 분야를 전공하면서 졸업할 때까지 6년 동안 한 과목을 제외한 모든 과목에 만점을 받았다. 1965년 4월 공산당에 가입하고 석달 뒤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 약 3년간 학과 후배들의 정치교육을 담당하는 정치보도원으로 근무했다. 1967년 간쑤성 수력발전소에 노동자로 배치되었지만, 이후 승진을 거듭해 1971년 수리전력부 제4공정국 기관당 총지부 부서기로 발탁됐다. 1974년 발전소 공사가 끝나자 간쑤성 성도인 란저우의 간쑤성 건설위원회 비서로 취임했고, 여기서 평생 동안 그의 강력한 후원자가 된 당시 간쑤성 당서기 쑹핑을 만났다.

 

1980년 간쑤성 건설위원회 부주임, 1982년 공산주의청년단 중앙위원회 서기 및 전국청년연맹 제6기 주석을 거쳐 1984년 공산주의청년단 중앙위원회 제1서기에 임명됐다. 1988년 티베트 시짱자치구 당서기로 근무했다. 이 기간 동안 시짱자치구에서 일어난 티베트 독립운동 진압에 성공하면서 동시에 1989년 톈안먼 사건의 위기도 피해갈 수 있었다. 7년 동안의 지방 근무를 마친 후 1992년 49세의 나이로 중앙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위원회 서기로 취임하면서 권력 최정상부에 올랐다. 1992년 14차 당대회에서 권력 7위에 오른 그는 1997년 16차 당대회에서 5위로, 1998년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는 국가부주석으로 선출돼 21세기 중국 정치의 핵심인물로 떠올랐다. 2003년에 국가주석, 2004년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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